수마이아에서 데바까지: 절벽 위의 낭만, 옛 연인과의 재회, 그리고 새로운 인연
'경이롭다'는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수마이아(Zumaia)의 바닷가를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눈에 담고 싶었다. 어제는 아래에서 보았으니, 오늘은 언덕 위로 올라가 보리라 마음먹었던 루트로 오늘의 첫걸음을 나섰다. 순례길(카미노)과는 다른 트레킹 코스였다. 이 길은 카미노와 떨어져 있으며, 절벽 위에 자리한 전망 좋은 산 텔모 교회(San Telmo Ermita)를 통과하는 길이다. 이 길이 나중에 카미노와 합쳐지는지 누구에게라도 물어봤으면 좋았으련만, 그저 대범하게 걸어갔다. '이 길이 아니면 다시 돌아가 카미노에 합류하면 되겠지' 하는 배짱이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갈 각오를 했건만, 운 좋게도 나중에 카미노와 합쳐졌다.)
어쨌든, 수마이아를 떠나기 아쉬워 절벽 위에 다리를 흔들며 앉아 발아래 펼쳐진 장관을 하염없이 감상했다. 세계를 여행하며 많은 장관을 보아왔다. 네팔의 히말라야, 터키의 카파도키아, 호주의 블루 마운틴, 인도의 함피 등등, 말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자연의 아름다운 속살을 경험한다는 것은 두고두고 생각나는 멋진 추억이다. 그리고 그 멋진 추억의 대장관 속에 이곳 수마이아도 꼽고 싶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이런 멋진 곳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조금은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수마이아가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곳에 이르기까지 이미 며칠을 걸어왔으며, 또한 이토록 멋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절벽에 앉아 아주 오랫동안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길게 시간을 보낸 후에야 다시 길을 나섰다.
북쪽길, 구남친 같은 너
또 한참을 걷는다. 한참을 산을 오르고 또 걷고, 힘들면 그냥 풀밭에 앉아 과일을 먹는다. 단조로운 일과일 뿐이지만, 무거운 배낭에 어깨가 아프고, 엉덩이는 중력가속도를 받아 무거울 대로 무겁지만, 멋진 풍경만큼은 흘린 땀을 충분히 보상해 준다.
문득 예전에 대학생 시절, 아주 잘생긴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 어찌나 잘생겼던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 돌아보던 그런 사람이었다. 연예인으로 비유하자면 배우 오지호와 가수 그룹 위너의 진우를 섞어 놓은 듯한 미모였다. 그 미모에 키까지 훌쩍 커서 모델 제의도 많았고, 연예인 하라며 엄청난 유혹도 많았던 친구였다. (정작 본인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질색했지만.) 실제로도 같이 데이트하다가 방송 카메라가 따라와서 도망치기도 했었다. 어쨌든, 이 친구와 사귀는 동안은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왜 이렇게 잘난 친구가 날 좋아하고 만나주지?'라는 의심이 매시간 들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에게 찝적대고 거침없이 덤벼드는 주변 여자들 때문에 엄청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도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 그 미모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져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었다.
이곳 순례길, 이른바 북쪽길이라는 이 길은 꼭 그 잘생긴 구남친과 닮았다. 프랑스길보다 체력은 두 배가 더 필요하지만, 풍경은 만 배가 더 아름다운 이 북쪽길 말이다. 매일매일 산을 타야 하기에 걷는 것은 지독하게 힘든데, 풍경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아 자꾸만 방실방실 웃음이 난다.
(사족을 달자면, 그 친구 이후로 나는 잘생긴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서인지, 잘생긴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 물론 사람인지라 아름다움에 매혹되기 쉬우니 잘생긴 남자를 보는 것은 좋지만, 잘생긴 남자를 '남자'로서는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뭐, 그들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히힛.)
새로운 인연, 한국인 '썬'과 스페인 '마리아'
허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바스크 음악이 울려 퍼지는 작은 바(bar)에 들어가 스파클링 워터와 계란 오믈렛(또르티야)을 시켜 먹고 있는데, 뭔가 익숙한 뒤통수를 가진 청년이 들어왔다. 스포츠 흑발 머리를 보니 영락없이 한국 스타일의 헤어였다. 반갑게 말을 건네니 그 청년도 미소로 반겨줬다. 그와 나, 우리 둘 다 서로에게 북쪽길에서 만난 첫 한국인이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그의 동행자였던 '마리아'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한국 청년 '썬'과 이틀 전에 만나 순례길을 함께 시작했다는 '마리아'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왔다고 했다. 프랑스 순례길을 걸을 때 처음 만난 스페인 여성의 이름도 '마리아'였는데, 북쪽길에서 만난 첫 스페인 여성의 이름도 '마리아'라니 뭔가 데자뷔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날을 시작으로 마리아는 나의 북쪽길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게 되었다. 프랑스길의 마리아와도 그랬으니, 즐거운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만난 그들과 잠시 수다를 떨고는 내가 먼저 길을 나섰다.
잠시 평탄한 길을 걷는가 싶더니만, 또 오르막길이었다. 아이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오르막길을 가다가 결국 다시 나타나는 마을의 한 식당에 들어가 결국 큰 잔에 맥주 한 잔을 시켜 마셨다. 이번 순례길만큼은 술을 줄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알코올이 더위와 갈증, 그리고 힘든 발걸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맥주 한 잔으로 잠깐의 피로를 풀고 다시 길을 나서는 순간, 또다시 미친 듯한 오르막길이 펼쳐졌다. 게다가 한낮의 땡볕도 무시할 일이 아니었다. 결국 길옆에 있는 그늘막에 비옷을 깔고는 대자로 누워 낮잠을 청했다. 내 뒤에 따라오던 영국 여성 4인방이 응원을 보내왔다. 낮잠 자는 게 뭐 대수라고, 그들은 갑자기 앞에 가던 내가 사라졌다며 걱정했다는 듯 온갖 수다를 퍼붓고 사라진 뒤에야 간신히 꿀 같은 쪽잠을 청할 수 있었다.
데바에서의 특별한 휴식, 그리고 마음을 나누는 대화
쪽잠으로 휴식을 취하고는 또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여 오늘의 목적지인 데바(Deba)에 도착했다. 데바 진입로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를 내려오느라 발가락이 찌부러지는 고생을 해야 했다. 데바는 특이하게도 기차역을 개조한 순례자 숙소로 순례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다. 1층은 보통의 기차역이지만, 2, 3층은 순례자들의 숙소로 사용된다. 공간 활용이 아주 영리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주방은 없지만, 침실도 깔끔하고 샤워실도 잘 정비되어 있다. 깨끗한 시설에 비해 5유로라는 저렴한 가격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기차역'이라는 점이다. 시끄럽다는 것이 아니라, 여차하면 기차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유혹이 강하다는 것이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나면 그다음 코스는 똑같다. 씻고, 빨래하고는 동네 탐정놀이를 하러 나가는 것이다. 늘 반복되는 생활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일행이 생겼다는 점이 달랐다. 아까 낮에 만난 '썬'과 '마리아'였다. 저녁은 다 같이 했지만, '썬'은 쉬러 일찍 들어갔고, 나와 마리아만 단둘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바닷가에 가서 발을 물에 담그고, 모래밭을 맨발로 거닐면서 아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동 위탁소에서 일하는 마리아는 그래서인지 다인종, 이민 가족, 빈민층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녀가 일하는 위탁소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런 가족 소속이기에, 더 많은 이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나라를 여행하는 첫 순례길이 어떠냐고 질문했는데, 그녀는 자신도 오늘 그 생각을 했다며 놀라워했다.
"내 나라를 여행하는데 내가 꼭 이방인이 된 느낌이야. 이렇게 한국,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같이 다니니깐 늘 알던 스페인이 다른 시각으로 보이게 되었어."
그것은 나도 느끼는 바이다. 여행하면서 만났던 외국 친구들이 한국에 왔을 때, 함께 많은 곳을 여행했는데, 외국 친구들로 인해 나도 내 나라를 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늘상 보고 익숙한 작은 사물들을 다르게 보는 힘이 생겼고, 장점은 뜨겁게, 단점은 냉정히 들여다보는 여유도 생겼다고나 할까? 식당 테이블마다 붙어 있는 작은 서랍에서 수저를 꺼내는 그 사소한 행위에 외국 친구들이 감탄하는 것에 짐짓 놀라기도 하고, 외국 친구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내가 한국인일 줄 모르고 반말로 "이 새끼들 어느 나라 새끼들이야?"라며 자기들끼리 히죽거리는 무례한 태도에 경악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지금 순례길을 걷고 있는 마리아도 겪고 있는 것이다.
말이 잘 통해서였는지, 우리 꽤 오랫동안, 그리고 숙소 앞의 바에서까지 와인과 함께 긴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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